바쁘다는 핑계로 공연을 본 지 3주가 다 지나서 이제야 펜을 든다. 밀린 숙제를 안 한 듯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생생했던 기억과 감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물가물 해지며 잊혀진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지금 글을 쓸려고 하니 벌써 기억이 잘 안 난다. 글은 감동받은 그날 바로 써야 한다는 철칙을 새삼 다시 느낀다. 더 늦기 전에 기억을 더듬어보자.

LA 오페라는 함부르크 발레단과 협력하여 존 노이마이어의 안무로 유명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 공연이 도로시 첸들러 극장에서 있었다. “ 바흐 ”하면 발레수업시간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클래식 음악 중에 하나이다. G 선상의 아리아. 미뉴엣. 무반주 첼로 음악 등 수많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림바링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글을 쓸 때도 바흐의 음악을 자주 틀어놓는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바흐 하면 친근감을 갖게 된다.

바흐에 대해 아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 배운 것이 전부여서 음악이론은 잘 모른다. 음악의 아버지, 평균율, 소나타 협주곡, 푸카, 커피 칸타타 정도만 바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발레를 하면 좋은 점은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는다는 것이다. 4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한 나는 클래식 음악을 매일 듣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악상이 떠오르기 보다는 발레의 동작, 느낌, 감정, 손끝, 눈의 시선이 먼저 떠올랐다. 바흐의 죽음이 바로크의 끝이라고 할 만큼 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그 시대에는 바흐가 조명되지 않았다. 100년이 지난 후에 멘델스존에 의해 재조명되고 “ 마태 수난곡” 전곡이 연주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글귀가 절로 생각났다.

 

공연시간이 장장 4시간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 한 좌석에 오래 않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리부터 걱정을 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 마태 수난곡 “ 전곡을 끝까지 들어보지 못 할거 같았다. 그래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집에 있는 음악사 책을 다 뒤적여 보며 일요일 오후 공연장을 나섰다.

 

예술의 위대함이 바로 이런 것일까? 무에서 유를 만든다. 오케스트라단, 발레단, 코러스 합창단 이 함께 어우러서 무대가 한가득이다.그런데도 무대가 혼란스럽지 않다. 질서 속에 조화와 균형이 있다. 오페라보다는 발레가 메인인 거 같다. 성악가는 무대에 오르지도 않고 오케스트라단 왼쪽에 앉아서 아리아를 부른다. 장장 70여 소단원 4시간 이루어진 대 장편의 드라마를 존 노이마이어는 어떻게 발레안무를 했을까? 생각하니 경이롭다. 나는 단 3분의 안무도 많은 생각을 해야하고 그 순서도 잘 안 외워지는데 그것을 외워서 공연하는 무용수 또한 대단하다. 단순한 흰색 의상, 길게 놓인 의자, 무릎을 끌는 동작이 여려번 반복되는 것이 예수의 고통, 수난의 감정적 반응을 잘 표현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어느 순간의 일이, 지금의 감정과 어울려 맞닥뜨리는 예술 장면을 보았을 때 숭고의 미를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그림을 보았을 때, 음악을 들었을 때, 춤을 추었을 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스탕달 신드롬이라고나 할까?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의 고통스러운 눈빛, 절망의 눈빛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단호하고, 용서하는, 구원의 눈빛을 보았다. 예수가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 나를 쳐다보며 내 손을 잡으라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아찔하며 온몸에 힘이 빠지며 어지러워졌다. 혹시나 누가 나의 이런 모습을 봤을까 봐 겸연쩍어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를 고쳐 앉는다. 신비의 체험, 춤 속으로 나는 빨려 들어갔다. 그 느낌,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